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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 왜곡과 비판 (1) 등록일 2019.04.30 16:37
글쓴이 애국정책전략연구원 조회 22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 왜곡과 비판

 

 

제주43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감사 이승학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43정부보고서)20001월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에 의해 200312월 노무현 정부에서 발간되었다. 그러다 보니 43정부보고서는 노무현 정권의 시각이 그대로 배여 있는 좌편향적 보고서가 만들어졌고, 권력에 의해 탄생된 관제 보고서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볼수 있다. 또 특별법 제정은 애초부터 43사건의 진상 규명에는 관심이 없고, 그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권력자들이 의도했던 것은 제주43사건의 정당성을 어느 정권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반국가적 반역사적 음모에서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43정부보고서가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인권에 초점을 맞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건인 43사건에서 이데올로기를 배제해버리면 진실은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다. 43정부보고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피해를 확대 과장하여 군경에 의한 인권유린만을 강조했고, 폭도들의 양민에 대한 인권 유린에는 묵살하거나 왜곡 축소했다.

 

 

1. 제주43사건의 발발 원인과 성격

 

. 제주43사건의 발발 원인

 

제주43사건은 남노당 중앙당이 510총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폭동 지령을 내려 발발하였는데, 중앙당은 폭동 지령을 제주43 발발 이전에 문서와 구두로 내렸고, 한번은 올구를 통해 폭동에 경비대를 최대한 동원하라고 지시하는 등 3번이나 폭동 지령을 내렸다.

 

(1) 문서 지령으로 남로당 중앙당은 제주도당에게 “2월 중순부터 35일 사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켜라. 경찰간부와 고위관리들을 암살하고 경찰무기를 노획하라. 총선거와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폭동 지령문이 122일과 212일 등 두 번이나 압수된 것으로 보아 남로당은 폭동지령을 두 번 이상 문건으로 지시하였음이 드러났다.

 

(2) 구두지령은 27폭동이 큰 성과 없이 끝나자 남로당 중앙당은 2월 중순에 이재복을 제주도에 보내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장 김달삼에게 “UN에 의한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우익정부가 들어서고 우리는 설자리가 없어진다.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단선반대투쟁을 강력히 전개하라는 구두지령을 내렸다.

 

(3) 올구를 통한 지령은 전남 파견 올구가 2월 말에 제주도를 떠났다가 복귀하여 315일의 회의시 국경프락치는 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으며, 이번의 무장 반격에 이것(경비대)을 최대한 동원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도 올구가 남로당 중앙당을 방문하고 나온 지시로 나온 것으로 보아 중앙당의 지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주43사건 발발원인에 관하여 중앙당의 폭동 지령문이 2건이나 압수되었고 중앙당의 폭동에 관한 구두지령에 관한 증언이 확보되었으며, 제주도당이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하자 무장투쟁에 경비대를 최대한 동원하라는 중앙당만이 내릴 수 있는 지시를 315일에 올구가 내렸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당에 보낸 서신에도 단선단정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43사건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 제주43사건의 성격

 

제주43사건의 성격은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사건, 사태, 폭동, 반란, 무장봉기, 인민봉기, 인민항쟁, 민중항쟁 등으로 여러 가지로 불려오고 있다. 제주43사건 발발초기에는 폭동론이,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는 반란론이 우세하였다. 1980년대 말에 광주 518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매김되면서 제주43사건은 민중봉기’ ‘민중항쟁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1) 제주43사건을 민중봉기나 민중항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사건발발이 미군정의 강압적 통치에 항거한 주민의 자발적 저항운동으로 진단하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194843일 경찰지서 습격, 우익인사 살해한 사건에 동원된 사람들은 순수한 주민이 아니라 군사훈련을 받은 유격대 및 자위대, 남로당원들이었다.

 

(2) 민중봉기라면 남로당이 무장대(인민해방군)를 사전에 조직하여 군사작전을 하듯이 사건을 일으켰으므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탄압에 저항하여 봉기했다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본다.

 

(3) 미군정이 강압적 통치를 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경찰이나 우익청년단이 주민을 무조건 연행구타했다고 하나 연행된 자들은 대부분 불법시위를 한 좌익인사들이거나 좌익으로 의심받던 자였다. 사상적으로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당시의 상황에서 연행하여 고문 등을 자행한 것은 조사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던 것이지 일반주민을 무조건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4) 민중봉기나 민중항쟁론자들은 경찰의 탄압 때문에 주민들이 봉기했다고 주장하면서 고문치사사건을 거론하는데, 치사사건 이전에 신촌회의에서 반격전을 결정하였으므로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아진다. 이들은 미군정이 일제시 경찰 등 친일인사를 채용하였고, 관리들이 부패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제주도만의 상황이 아니라 전국적인 상황이었고, 이것을 가지고 제주도에서만 미군정이 통치에 실패했다고만 할 수 없다.

 

(5) 남로당 제주도당은 신촌회의에서 경찰에 대한 무장공격을 결정하고 중앙당의 승인하에 자체양성한 유격대와 국방경비대 제9연대를 동원하여 일거에 제주전역을 장악하여 인민공화국 수립을 꾀하려고 했다. 인민공화국 수립은 민주체제를 공산체제로 전환하는 곧 체제전복이 전제되므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반란을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남로당 반란군측은 소위 인민해방군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19481024일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선전포고문국방군과 경찰원에게 보내는 호소문3,000매를 인쇄하여 요소요소에 살포했다.

 

남로당 반란군, 흔히 말하는 바대로 인민해방군 사령관격인 이덕구가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문에서 머지않아 권토중래 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 것은 1948111일을 기해 군경 프락치들과 합세하여 공세를 취하여 군과 경찰을 일거에 제압하고 제주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행동이 반란행위임을 대내외에 크게 알린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남로당 중앙당은 제주도당에게 최초에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제헌의원 선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폭동 지령을 내렸다가 그 후 올구를 통해 경비대 동원을 명령했고, 남로당 제주도당은 장기간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하면서 친정부 인사들과 경찰가족을 살해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상징하는 인공기를 게양했고, 대정부 선전포고를 했으며, 국군과 장기간 치열한 전투를 했고, 제주도를 무력으로 장악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으며, 나아가 육지에서의 무장봉기로 육지가 혼란해 지면 북한의 무력남침으로 적화통일을 하여 했던 점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제주43사건의 성격은 폭동이 아니라 명확하고 분명한 반란인 것이다.

 

 

2.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 작성 내력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는 보수(우파)측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했던 진보(좌파)측 인사들이 보고서 채택을 강행함으로써 출간되었다.

 

. 199712월의 대선에서는 여당의 이회창 후보와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43사건 문제 해결 공약했으며, 대선 후에는 여야 모두 제주43사건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 야 모두 제출한 제주43사건 특별법안이 하나로 통합되어 국회를 통과하였다.

 

.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 2000112일 법률 제6117호로 공포되었다.

 

. 20008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20(당연직 8, 위촉직 12)으로 구성된 제주43위원회가 발족되었다.

 

. 보고서 작성을 위하여 15(당연직 5, 위촉직 10)으로 기획단을 구성하고 기획단에 전문위원 5명과 조사요원 15명을 채용하게 된다.

 

. 계약직 공무원에 공채된 사람들은 나종삼, 양조훈, 김종민, 박찬식, 장준갑 등 5명이다.

 

.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작성기획단장 임명 문제가 기로에 서서 43진영에서는 배재대 교수인 강창일을 단장으로 강하게 밀었으나 200010월 국사편찬위원회 이상근 실장이 단장으로 내정한 것만이 아니라 이한동 국무총리로부터 임명 사인까지 받은 상태였다.

 

. 양조훈, 고희범은 추미애 의원,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 김성재 정책수석 등을 움직여서 대한민국의 총리가 서명한 내용을 번복하여 진보측의 의도대로 박원순 변호사를 기획단장으로 결정되도록 하였다.

 

. 수석 전문위원 양조훈은 제주43특별법 제정을 위하여 제주도에서 모금 운동을 했다고 말했으며, 김종민과 박찬식 등 유능한 인재를 전문위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말했고, 기획단장 임명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진상 조사 보고서 작성의 핵심 인물로, 유능한 인재 김종민과 박찬식을 데리고 왔다고 말은 한 것은 전문위원 5명 중 3명을 선발전에 미리 내정하였음을 실토한 것이다.

 

. 서북청년단 출신을 주축으로 한 제주경찰이 194967일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 2대 사령관 이덕구를 사살하면서 이덕구의 호위병 양생돌을 생포하는 과정에 제주43사건 진실을 밝히는 귀중한 문서 압수한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를 보수측에서는 자료중 제일 가치가 많은 자료임으로 자료집에 넣을려고 하자 진보측 발간 실무를 맡은 김종민은 그 자료는 국가 기관에서 수집한 자료가 아니어서 자료집에 넣을 수가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보수측 전문위원과 진보측 전문위원간에 자료 선택 문제로 옥신각신 언쟁을 하다가 김한욱 지원단장 중재하에 임시 자료집 제12권에 겨우 포함되어 발간되었다.

 

 

3. 제주43사건 왜곡과 날조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역사 뒤집기

 

노무현 정부는 43정부보고서를 통해 43사건의 진실을 담아내는 것보다 정치적 선동에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43정부보고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남로당 선전지를 방불케 하는 반역적 보고서가 되었고, 오히려 제주43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과 선동의 보고서가 되어 버렸다.

 

43정부보고서 서문에서 고건 총리는 43정부보고서는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여 43사건에 대한 성격 규명을 후세 사가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43정부보고서 말미 결론부분에는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43일 남로당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사건이라고 성격 규명을 해놓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43정부보고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국무총리는 43정부보고서를 만든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중앙위원회) 위원장이다. 43정부보고서 작성과 운영의 책임자가 앞에서 43에 대한 성격 규명을 보류해 놓았는데 실무자들은 뒤에서 멋대로 성격 규명을 해놓은 것이다. 그것도 국가적 합의나 연구, 제대로 된 토론도 거치지 않고 자기들 집단의 시각을 국가가 편찬하는 정부보고서에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정부보고서 작성에 대한 농단이자 대한민국에 대한 국정농단이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편향성

 

43정부보고서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등 좌편향과 왜곡으로 작성되어가자, 43중앙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던 우파인사들은 보고서 작성이나 위원회 운영에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한광덕 예비역 장군, 이황우 교수, 나종삼 전문위원 등 우파위원들이 43정부보고서 내용에 부동의의사를 표시하고 사퇴해 버렸다. 좌편향 정부보고서에 대한 견제 장치가 없어져 버리자 43정부보고서는 대다수였던 좌파위원들에 의해 그들만의 방향을 향해일사천리로 내달렸다.

 

43정부보고서는 제민일보에서 연재했던 ‘43은 말한다의 복제판이었다. 43정부보고서의 진상조사팀에 있던 양조훈 수석전문위원과 김종민 전문위원은 43정부보고서 작성의 주축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제주신문에서 시작한 43취재단의 책임자 및 주요 요원으로, 제민일보로 옮겨간 이후에도 이 사건에 대한 현장 취재를 계속해왔다. 그런데 이들이 시작한 43취재는 이 사건을 국가 폭력에 의해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는 즉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반 인권적 사례를 중심으로 했고, 이를 신문에 연재했고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자료 수집의 경험이 많아서 이 사업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이 될 수는 있겠지만, 다시 생각한다면, 신문의 저널성과는 달리 역사적 사건을 규명하는 학구적인 입장과 중립적인 자세로 규명 작업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인선이었다.

 

43정부보고서에는 대한민국 우파의 시각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제출된 수정의견들은 전부 묵살되었다. 200332943중앙위원회에서 1차 정부보고서를 통과시킬 때 929일까지 6개월간의 기간을 두고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오면 재심의 하여 보고서 내용을 수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차 발간보고서를 늦게 배포해 주는 바람에 수정의견 제출자들은 의견 집필에 철야작업을 해야 했고, 결국에는 제출된 수정의견도 반영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 194731사건의 왜곡

 

제주43정부보고서는 1947년에 발생한 31사건이 43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31기념식장의 발포 사건 때문에 43이 발발했다는 주장은 좌익들의 억지 선동이다. 43정부보고서는 좌익 폭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31사건을 억지로 끌어들였고, 경찰의 발포에 대항하여 43폭동이 일어났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43공산폭동을 43항쟁으로 미화, 왜곡했다.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교정에서 벌어진 31기념식의 행사 주체는 제주도민이 아니라 남로당 제주도당 하수단체인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었고, 집회 불허가처분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불법집회였다. 집회에는 반미 삐라가 뿌려지고 적기가가 울려 퍼졌다.

 

집회가 끝나고 남로당원들은 시가지로 뛰쳐나가 무력시위를 벌이고, 그 와중에 누군가 플래카드용 장대를 뽑아내 기마경찰이 탄 말의 항문을 찔러대는 바람에 말이 놀라며 김구0 어린아이가 길가 도랑으로 굴렀다. 남로당원들은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말로 치여 죽였다며 선동을 했고 이에 집회는 폭력화 되었다. 폭력시위대로부터 경찰이 공격을 받자 경찰은 공격받는 경찰을 보호하기 위해 발포가 벌어졌고 집회 참가자 6명이 사망했다.

 

43폭동의 발발은 31사건의 발포 다음 한 달 후가 아니라 13개월 후인 1948년에 사건이 발발했다. 31사건을 43의 원인으로 치부하기에는 현격한 시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31기념식의 발포 사건은 제주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당시 남로당은 당세를 과시하고 미소공위 개최를 촉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31기념식을 준비했다. 1947년의 31기념식은 전국에서 좌우익이 따로 행사를 열었고, 가두시위를 벌이다 서로 충돌하며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31기념식의 발포로 서울 부산 등 전국에서 사망자 16, 부상자 22명이 발생했다.

 

31발포는 당시 해방정국에서 좌우익이 충돌하는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31발포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에서만 폭동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남로당은 43폭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2·7 폭동 지령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이 내린 2·7 폭동 지령은 제주 4·3사건의 발단이었다. 2·7구국투쟁 실현을 위해 모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거물급 간부들이 대거 1948122일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2·7폭동은 좌절됐다. 이 좌절된, 연기된 폭동이 제주의 4·3사건폭동이다.

 

1948년 경찰은 122일 새벽 3시에 남로당 간부 모임이 열리던 핵심 조직 아지트인 신촌리를 급습하여 압수된 문서는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남로당의 강력한 투쟁계획 지령으로 “19482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이른바 ‘2·7구국투쟁 지령문’”이었다.

 

경찰이 122일 남로당 조천지부(신촌리)를 급습하여 노획한 문건에는 남로당이 2월 중순부터 3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으며, 또한 문건에는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4·3정부보고서는 폭동 지령문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153)했다. “이 문건은 누가 지령했는지 그 실체도 나와 있지 않지만, 나중에 진행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투쟁 결정과정을 보더라도 그 시점에 의문점이 있다.”고 밝혔다.

 

43정부보고서의 의문은 ‘4·3은 남로당의 지령이 아니라 도민 항쟁이다라는 사고의 틀에서 본 의문이다. 미군 971방첩대의 보고서 제주도 남로당의 음모에는 유엔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내용이 밝혀져 있었으며, 이 내용은 바로 남로당이 2·7 폭동을 지령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2·7폭동은 4·3사건의 발단이라는 것이다.

 

 

. 김익렬 ‘428평화회담의 허구

 

43정부보고서에는 ‘428평화회담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등장한다, 당시 진압 사령관이었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제주인민해방군사령관 김달삼과의 회담을 이르는 말이다. 43정부보고서는 이 회담으로 평화 무드가 조성되었지만 경찰과 우익단체들의 방해로 43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달았다고 43의 책임을 경찰과 우익단체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러나 43정부보고서에 등장하는 428평화회담이라는 것은 허구였다,

 

428평화회담은 김익렬의 유고에서 주장한 말이다. 김익렬은 198812월 사망했고, 사후에 유고가 발표되었다. 김익렬의 유고는 김달삼과의 협상, 조병옥 경무부장과의 갈등 등 43에 대한 김익렬의 시각을 보여주는 문서이다. 그러나 김익렬은 그의 유고에서 수많은 거짓말을 했음이 드러났다. 김익렬의 기고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익렬의 기고는 김달삼과의 면담 1개월여 후에 작성하여 언론에 기고한 것이었다.

 

김익렬은 43폭동 발발 직후인 19484월말에 인민해방군사령관 김달삼과 면담을 가졌다. 그리고 486월 중 김달삼과의 면담과정을 기고로 작성하여 86, 7, 8일에 걸쳐 국제신문에 발표했다. 그리고 1970년대 다시 유고를 작성하여 두었다가 사후에 발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기고와 유고는 같은 사건을 다룬 회고임에도 불구하고 김익렬의 증언은 너무 많이 엇갈린다. 김익렬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김달삼을 만나 1개월 후에 쓴 기고와 죽기 전에 쓴 유고가 일치하는 증언이 별로 없었다. 김익렬은 43사건에 대하여 유고에서는 관의 압정에 대한 민중폭동으로 표현하지만 기고에서는 좌익계열의 폭동으로 규정한다. 면담 날자도 김익렬의 기고에는 430일이지만 유고에는 427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회담 장소, 배석자, 회담 내용, 회담 결과까지 김익렬의 진술은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 면담 후의 상황에서도 기고에서는 협상 결렬로 묘사하였지만, 유고에서는 협상 성공 후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428평화회담은 무슨 거창한 평화회담이 아니라 그냥 면담이었고, 428일에 열리지도 않았다. 43정부보고서는 김익렬의 기고를 묵살하는 대신 김익렬의 유고를 대대적으로 인용했다.

 

 

. ‘오라리 사건의 창조

 

43정부보고서는 협상을 파기하기 위하여 미 군정이 치밀하게 계획한 것을 경찰이 실현하여 오라리 사건을 왜곡 날조하여 만들었고, 이것이 협상 파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라리 사건의 실체를 보면 1948430일에 동서지간의 두 대동청년단원의 아내 두 여인이 남로당 자위대에 납치되었다. 두 여인 중에 한 사람은 남로당 자위대에 의해 살해되었고 다른 여인은 탈출하여 경찰에 사실을 알렸다. 뒷날 남로당 자위대에 의해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면서 대동청년단원들에 의해 치러졌다. 장례가 끝나자 대동청년단원들은 마을로 들어와서는 입산한 좌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벗어날 무렵인 오후 1시경, 무장대 20명 가량이 총과 죽창을 들고 청년들을 추격했다. 청년단이 급히 피해 이 과정에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시각을 전후해 마을 어귀에서 이 마을 출신 경찰관의 어머니가 피살되었다.

 

오후 2시경, 서청대청 단원들로부터 무장대 출현 소식을 접한 경찰기동대가 2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오라리 마을로 출동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장대는 이미 마을을 떠났고, 주민들은 불붙은 집을 진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마을 어귀에서부터 총을 쏘며 진격해오자 주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산 쪽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마을 여인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때 마을 여인의 소녀는 어머니가 총에 맞아 숨졌을 때 하늘에서 비행기가 오랫동안 머리 위를 맴돌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김익렬 식 협정은 파기되었다는 것이다.

 

43정부보고서의 주장에 따르면, 428평화회담에서 국군과 인민해방군 간에 72시간(3)의 휴전을 약속했는데, 51일 벌어진 오라리 사건이 이 휴전을 깨뜨렸고, 그래서 43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충돌로 치달았다는 것이었다. 51일 오라리 사건을 협정 위반으로 몰기 위해 428일을 협상일로 조작한 것이다.

 

43정부보고서에서는 오라리 사건을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표현하여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입체적으로 촬영된 것으로 보아, 미군의 계획적인 사건이었고, 방화사건이 무장대 측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편집해 놓은 것은 강경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이틀 전인 429일에는 오라리 대청단장과 부단장이 오라리 폭도들에게 납치당해 살해당했고, 30일에는 대청단원의 부인들마저 납치당해 한 명이 살해당했다. 이런 사실은 빼 버린 채 43정부보고서는 우익단체원들이 방화하는 장면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사건을 왜곡시켰다.

 

우익단원들이 마을에 방화하고 철수하자 이번에는 마을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본 민오름의 폭도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피신 중이던 강규찬 순경의 모친을 길에서 살해했다. 다음에는 폭도 출현의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총을 쏘며 마을로 진입했다. 이 장면은 미군기에서 공중 촬영되었다. 이 기록물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고, 현존하는 43의 유일한 영상물이다. 항공기 운용은 43폭동이 발발한 이후 4월 중순부터 전단지 살포, 참관 등의 작전에 항공기 두 대를 상시 운용하고 있었고, 항공 촬영은 딘 장군의 방도를 앞두고 상황 보고용으로 촬영 중이었는데, 여기에 우연히 오라리 사건의 일부가 촬영된 것이다.

 

경찰이 진입하자 폭도들이 철수해 버린 마을에서 불을 끄다가 경찰을 보고 도망가던 고무생 여인이 경찰에 피격되었다. 이번에는 사건 정보를 입수한 국군경비대 9연대가 마을로 진입하자 경찰은 철수해 버렸고, 9연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건 경위를 조사했다.

 

이처럼 오라리 방화사건은 그날 오라리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중의 하나였고, 그날 벌어진 오라리 사건은 딱히 특별할 것도 없이 43사건의 와중에 제주 여러곳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 남로당 중앙당 지령의 은폐

 

43정부보고서는 43폭동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43폭동의 주체였던 제주인민해방군이 남긴 유일한 문서인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문서는 김달삼이 월북할 때 가지고 가기 위해 인민해방군 측에서 자기들의 활약상을 직접 작성한 문서로, 1부는 이덕구가 소지하고 있다가 그가 사살될 때 경찰 측에 입수되었다.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는 3월 중순경 무장반격 지령을 받아 315일 중앙에서 파견된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하여 무장반격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43폭동의 주체세력은 중앙당의 지령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들의 후계체인 남한 좌익들은 경찰에 대한 제주도민의 자발적인 저항으로 일어났다고 거짓말의 43정부보고서를 남겼다.

 

이외에도 43폭동 당시 김달삼의 휘하에 있던 폭도대장 김봉현과 유격대원이었던 김민주는 일본으로 밀항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썼다, 여기에서도 중앙당의 지령은 자주 언급되고 있다, 김봉현은 중앙당에서 내려온 천검산이라는 가명을 쓰는 인물이 43폭동을 지휘했다고 밝혔다, 천검산은 남로당 중앙당의 군사부장 이중업이나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87월에 작성된 미군 브라운대령보고서에서도 본토에서 제주도로 파견된 남로당 조직책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브라운 대령은 19485월까지 고도로 훈련된 선동가와 조직가들에 의하여 43폭동이 수행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제주도 남로당의 활동은 전라남도 도당의 지시를 받고 있으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도당 본부로부터 모든 지령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 다랑쉬 사건의 날조

 

1992년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 오름 근처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여자 3명에 어린이 한 명이 포함된 43 당시의 유골들이었다. 그러자 제주도에서는 선동의 광풍이 몰아쳤다. 다랑쉬 유해는 선량한 양민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랑쉬굴은 선량한 양민을 학살한 잔인한 군경들의 상징으로 만들어졌다.

 

다랑쉬굴의 유해는 양민들이 아니라 남로당 제주도당 구좌면당의 전투원들이었고, 여자들은 취사병, 어린이는 취사병의 아들이었다. 다랑쉬굴은 남로당 구좌면당의 비밀 아지트였다. 그리고 이들은 군경에게 학살된 것이 아니라 진압대에 포위된 채 굴속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 전사한 인민해방군들이었다. 그리고 진압대가 다랑쉬굴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인민해방군의 세화리 대습격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1992년 다랑쉬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사건 당시 다랑쉬굴에 진입했던 함만실, 오지봉 채정옥 등은 생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찰 조사에서 다랑쉬 사건의 내막을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