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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 왜곡과 비판 (2) 등록일 2019.04.30 16:38
글쓴이 애국정책전략연구원 조회 15

. 43희생자 숫자 부풀리기

제주43의 진실에서 가장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43희생자 숫자에 대한 부분이다. 43정부보고서를 쓴 사람들은 걸핏하면 제주43사건의 희생자가 3만 명, 또는 수만 명 이상이라고 희생자를 부풀리고 국민을 선동했다. 그러나 43정부보고서에 43희생자는 13,564명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현재 제주43평화공원에 봉안되어 있는 43희생자 위패는 14,117기라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43희생자가 수만 명이 넘는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선동이다.

43평화공원에 있는 위패 14,000여기가 희생자라는 것도 일종의 선동을 위한 용어 장난이다. 43희생자 중에 43사망자는 10,344명이기 때문이다. 희생자라는 명칭 때문에 43사건 당시 사망자가 14,000여 명으로 오해하는 이가 많다. 43희생자라는 의미에는 후유장애인과 생존자, 생사가 불확실한 행방불명자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43피해자 조사는 여러 번 있었다. 43직후부터 90년대까지의 조사에서 사망자 숫자는 89천여 명에 머물렀다. 그러나 조사가 거듭될수록 사망자는 증가하면서 2000년 이후 조사에서는 1만 명을 넘어섰다. 덩달아 가짜 희생자도 증가했다는 뜻이다.

사망자 10,000여 명의 숫자에는 군경과 폭도, 양측에 의한 피해자가 망라되어 있다. 이 사망자 중에 폭도 측에 의해 살해된 양민은 1,764, 군경 전사자는 336명이다. 1만여 명의 사망자 중에서 2천여 명은 폭도에 의해 살해된 숫자인 것이다. 폭도에 의해 살해된 2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망자 8천여 명은 무고한 양민 사망자와 군경에 대항하다 전사한 인민해방군이 혼합되어 있는 숫자다. 이 중에서 무고하게 죽은 양민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이 숫자를 가늠할 길은 아직 없다. 43희생자에 대한 정보가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기에 정확한 숫자는 개별조사를 통해서만이 파악할 수 있다.

43정부보고서에는 43폭동의 무장 세력을 5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이 만 9년 동안 군경들과 전투하며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500명은 심하게 축소시킨 숫자다. 김봉현김민주가 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는 제주인민해방군의 핵심세력을 3천명이라 기록했고, 미군 브라운 대령 보고서에는 4천명의 장교와 사병을 보유하고 있다고 썼다. 신상준 박사의 제주도43사건에는 전성기의 무장 세력이 35천명으로, 존 메릴이 쓴 논문 제주도 반란에도 35백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러 기록들을 감안하면 제주인민해방군 숫자를 대략 4천여 명 수준으로 감안하더라도 이 중에 절반 정도인 2천여 명 정도는 교전 중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연구가 이선교 목사는 교전 중 전사한 인민해방군 숫자를 최소 1천여 명 이상으로 꼽았다.

군경에 의한 사망자 8천여 명 중에서 우선 군경과 교전하다 사망한 숫자를 빼고, 거기에서 다시 43폭동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사망자의 숫자를 뺀 나머지 숫자가 무고한 양민의 사망자 숫자라 할 수 있다. 43 당시 군경이 수만 명을 죽였다는 선동은 불순한 선동일 수밖에 없다.

. 소개령(疏開令)과 축성(築城)

1948년 여름 소상상태에 접어들었던 43폭동은 99일에 북조선이 창건되면서 이에 고무된 폭도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소련 혁명기념일인 101일을 맞아 남로당 반란군들은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했고, 1019일에는 여수 14연대가 제주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무된 제주인민해방군 2대 사령관 이덕구는 1024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고, 111일에는 제주도 장악을 시도했던 군경프락치 사건을 터뜨렸다. 이에 정부는 11월부터 국군 내부의 남로당원을 색출하는 숙군을 단행했고, 11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남로당반란군들이 마을을 습격해도 경찰은 나가 싸우지 못하고 지서 안에서 농성할 정도로 무기는 빈약했다. 군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중산간 마을은 낮과 밤에 따라 지배자가 바뀌는 인민공화국의 해방구였다. 폭동이 초기에 근절되지 못한 이유는 남로당반란군들이 이런 중산간 마을을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폭도와 양민을 분리하기 위해 나온 대책이 소개령과 축성이었다.

19481117일 제주도에 계엄이 선포되었고, 1123일 계엄포고 제1호로 소개령이 내려졌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대피시키는 소개령은 남로당반란군과 양민을 분리하여 보급을 끊는 이유도 있었지만 곧 전쟁터로 바뀔 중산간 지역에서 주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소개령을 거부하고 잔존하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되어 사살되는 일이 잦았다. 43정부고서에서는 이 소개령을 초토화라는 용어로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있지만 소개령은 강자에 대하여 약자가 구사하는 전법이었다. 반란군은 강했고 단기간에 소탕할 수 없었기에 소개령은 반란군으로부터 양민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군의 특단의 조치였다. 그러나 소개된 주민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전무 했기에 소개된 주민들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다.

축성은 처음 지서 주변을 돌담으로 둘러 방호벽을 쌓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러던 것이 1948년 겨울로 접어들면서 남로당반란군들의 습격이 잦아지자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폭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주변에 성담을 쌓게 되면서 제주 전역으로 축성이 퍼져나갔다. 축성사업은 194812월부터 착수하여 19493월경에는 거의 모든 마을에 축성이 완료된다. 각 부락을 외성과 내성으로 둘러싸고 성담에는 몇 개의 출입문을 만들었다. 성담 주위는 가시덤불로 장애물을 설치하고 보초막을 만들어 경비는 민보단들이 맡았다. 축성을 하는 것도 주민이었고, 축성 후에 보초를 서는 것도 주민들이었으니 주민들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 정부군과 반란군의 전투

43정부보고서는 군인과 인민해방군 간의 전투를 대부분 은폐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보고서는 폭도들의 전력은 왜소하게 축소하고 국방경비대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채 양민들을 학살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43초기에 제주인민해방군은 국방경비대보다 우위의 전력으로 43폭동을 주동했고, 절정기에는 국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며 국군 부대를 전멸시키는 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정부군과 반란군이 치열하게 격돌했던 대규모 전투 몇 가지만 대략 살펴보면

(1) 고성리 전투

19481029, 이틀 전 애월지서를 습격했던 폭도들을 추격하던 9연대가 애월면 고성리 근처에서 약 200명의 반란군들이 회합하는 장소를 발견 급습했다. 8시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약 100여 명의 반란군들이 사살되고, 총기 일본도 망원경 등 장비 다수를 노획하였다. 일부 자료에는 폭도 135명 사살에 75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인민해방군은 지휘관급을 포함해 많은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2) 한림면 전투

고성리 전투에 이어 112일 인민해방군은 9연대 2대대 6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림국민학교를 대낮에 기습했다. 폭도의 대낮 습격은 초유였다. 인민해방군은 후퇴하는 척 하며 중산간 마을로 6중대를 유인하여 매복 공격하였다. 순식간에 중대장 이하 14명이 전사했고 수명이 부상을 입었다. 연락을 받고 지원 출동한 3중대가 현장을 수습하고 반란군 추격에 나섰다가 다시 매복 공격에 걸렸다. 중대장이 부상을 입고 7명이 전사하여, 장비 등을 버리고 후퇴했다. 다시 5중대가 야간 출동하여 수색하다가 반란군 야영장소를 발견하여 포위했다.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렸다가 집중 공격을 퍼부어 100여 명 이상을 사살했다. 포로를 심문하여 반란군의 아지트와 보급창을 파악하고 다시 기습공격으로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3) 신엄리 전투

19481219일 애월면 신엄리에 30여 명의 인민해방군이 침입하여 주택 30채를 불태우고 경찰과 주민 10명을 살해했다. 한림에 있던 9연대 7중대가 신고를 받고 출동하던 중 신엄리 부근에서 매복하여 기다리던 인민해방군의 기습으로 중대장 1명을 제외한 분대원 전원이 전멸했다. 이어 증원부대인 11중대가 공비들을 추격하다가 유인작전에 걸려 중대장과 소대장은 부상당했고 포로가 된 병사 15명은 죽창에 의해 살해됐다.

(4) 오등리 전투

194911일 이덕구가 직접 지휘하는 제주인민해방군 600명이 제주읍 오등리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 3대대를 급습했다. 폭도들이 군군 주둔지를 정면으로 기습한 전투였다. 치열한 교전 끝에 30명의 인민해방군이 사살되고 1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날 국군 장병 전사는 7명이었고, 일부 자료에는 10명 전사로 나와 있다.

(5) 월평리 전투

194916일 월평리에 인민해방군 1개 중대가 있다는 정보에 따라 첨병 임무를 띤 제2대대 6중대가 새벽어둠을 뚫고 전진하다가 적과 조우했다. 밤새 교전이 벌어졌고 6중대에서 7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인민해방군은 153기의 유기시체와 소총, 탄약, 일본도 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인민해방군 선전 삐라에서는 노랑개 50여 명을 처단했다고 자랑했다.

(6) 관음사 전투

월평리 전투에 이어 관음사 주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정부군과 반란군은 관음사 외곽에서 돌담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으며, 정부군이 수류탄 공격을 시작하니 반란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관음사가 불에 타 소각되었는데, 정부군이 관음사를 소각하였다는 반란군의 주장에 대해 당시 6중대를 지휘했던 이동준 소위는 인민군이 도주하면서 연기를 피워 추격을 방지하려고 관음사를 소각하였다고 증언했다.

(7) 의귀리 전투

1949112일 새벽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 2중대를 200여 명의 인민해방군이 습격했다. 포위당한 정부군과 반란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날이 밝아오자 이윤 분대장은 탄우를 뚫고 학교 지붕 위로 올라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적군 30여 명이 쓰러지며 전세가 기울어가자 반란군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정부군은 4명 전사에 5명이 부상당했고, 반란군 사살 96, 생포 14, 장비 다수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날 전투는 인민해방군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8) 남원면 전투

19492152연대는 남원면 산록에 반란군 주력이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동에 나섰다. 2시경 먼저 정보를 입수한 700여 명의 반란군이 야영 중이던 2연대 정부군을 공격해왔다. 탄약이 떨어질 정도로 4시간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반란군은 160여구의 시체를 버리고 패주했다. 이 전투에서 타격을 입은 이후 인민해방군이 대대적으로 마을을 약탈하는 대규모 습격은 없어졌다.

(9) 노루오름 전투

1949392연대 제6여단 유격대대 1개 중대가 공비 수색에 나섰다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반란군으로부터 노루오름 근처에서 습격을 받았다. 인민해방군 50여 명은 유리한 지형에 매복하여 국군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선두는 통과시키고 중앙부를 집중 공격했다. 이 기습으로 중대원 36명이 전멸했고, 소총 40, 식량 4, 담배 300갑을 빼앗겼다.

(10) 녹하악 전투

19493월말 제주도전투사령부 유재흥 사령관은 4개 대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비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에서 제1대대 제4중대는 차단 임무 수행 중에 반란군과 조우하며 전투를 벌였다. 반란군은 이덕구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과 중문면의 자위대가 합세한 1천여 명의 주력이었다. 4시에 시작된 전투는 낮 12시까지 지속되었다. 공비 사살 178명에 장비 다수를 노획하며 이 전투는 반란군에게 마지막 치명타를 가했다. 유재흥 사령관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였으나 소나무에 걸려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 폭도들의 대습격

11만평에 이르는 면적의 43평화공원의 주요시설과 전시물은 군경의 학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고 게시되고 있다. 11만 평 중에 폭도들의 살상을 증언하는 전시물은 단 두어 평 넓이에 불과하다. 43정부보고서도 군경의 진압활동은 확대 왜곡하면서도 인민해방군의 만행은 축소하고 있다. 600여 페이지 넘는 두꺼운 43정부보고서에서 인민해방군의 살상행위 기록에는 단 4페이지만을 할애하고 있다.

194843일부터 48년 중반까지는 제주 전역에서 인민해방군의 살상행위가 거의 매일 발생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잔인성은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것들도 많았다. 지면 관계상 폭도들의 살상행위를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나, 그 중에 규모가 컸던 폭도들의 습격을 몇 개만 나열해 보면

(1) 43일의 경찰지서 대습격

194843일 새벽 2시 제주도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면서 남로당 무장폭도들이 도내 경찰지서 12개를 일제히 공격하면서 43폭동이 발발했다. 이날 하루 동안에 경찰 및 우익인사를 포함해서 피살 12, 부상 25, 행방불명 2명의 피해가 발생했고 폭도 측에서는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되었다.

이날 국방경비대의 남로당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감찰청과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장폭도들의 폭동에 합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최종 순간에 출동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43폭동은 마지막 폭도 오원권이 체포되는 195742일 종료되었다.

(2) 510일 투표소 대습격

43폭동은 510일에 있을 제헌의회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주 전역에는 4월 중순부터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선거관리위원장이 피습당하고, 투표소의 선거관련 서류들이 탈취당하고, “모든 지방관리들은 사임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삐라가 뿌려졌다. 선거업무 공무원이 피습당하고 마을 리장들이 납치되는 가운데 510일 당일에는 제주읍과 북제주 관내 투표소 대부분이 기습을 받아 관련자들이 살해당하고 투표용지를 탈취당하고 투표소가 불에 탔다.

43폭동의 목적대로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유일하게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파탄되었다. 경찰과 군대는 변변한 대응을 못하는 가운데 4월부터 6월까지는 폭동의 절정기를 이루며 곳곳에서 폭도들의 살인 방화가 난무했다.

(3) 513일 저지리 대습격

1948513일 새벽 150명의 폭도들이 한림면 저지리(현 한경면 저지리)를 습격했다. 400여 채의 민가 가운데 130여 채가 화염에 휩싸였다. 향사와 초등학교도 소실되었다. 경찰관 1명과 주민 6명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하고 1명이 실종되었다. 저지리는 중산간마을로 경찰지서가 소재하여 경찰에 우호적인 마을이었고 살해된 주민들은 경찰보조원 등이었다. 폭도들은 불붙은 짚더미를 들고 다니며 우익인사의 집을 골라 불을 지른 다음 식량과 의복을 탈취하고 산 쪽으로 도망쳤다.

(4) 513일 함덕리 대습격

저지리가 습격당한 513일 오후 4시 약 300명의 폭도가 43일에 이어 함덕리를 재 습격했다. 주택 3채와 함덕지서가 불에 탔다. 강봉현 지서주임이 집중사격을 받아 숨지고 경찰 2명은 며칠 후 불탄 지서에서 불에 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부상당했던 경찰도 숨졌고 납치되었던 경찰관 3명은 대흘리 지경에서 살해되었다. 경찰관 어머니와 지서보조원도 살해되었고, 버스 안에 던져진 수류탄으로 버스운전사가 부상을 입었다. 함덕 마을을 점령한 폭도들은 주민들을 지서 앞에 불러 모아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지서주임의 시체와 지서를 불태웠다.

(5) 514일 한림지서 대습격

514일 죽창을 든 폭도 2백여 명이 세군데 방향에서 대낮에 한림지서를 습격했다. 한림지서는 43, 7일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 습격을 받았다. 폭도들은 이날 새벽에 명월리에서 우익인사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과 손자 등 3명이 한림지서를 습격하던 폭도들에게 납치되고, 한림면사무소 직원 3명과 협재리 농부 1명도 납치되었다. 이들은 며칠 후 동명리 지경에서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림지서 습격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폭도 5명이 죽었으나 교전 중에 응원경찰과 9연대가 도착하면서 폭도들은 산 쪽으로 퇴각했다. 후퇴하면서 동명리의 경찰관 본가를 불태우기도 했다.

(6) 도두리 납치 사건

518일 새벽 330여 명의 폭도들이 도두리를 덮쳐 마을을 돌며 우익활동가들의 남편과 아들 등 식구들을 산으로 납치했다. 우익단체원들의 어머니 두 명(52, 56). (19), 아들(9), 그리고 젋은 부인 두 명(24, 26)이었다. 24세의 부인은 폭도들에게 사정하여 네 살 된 아들이 중간에 버려지는 것을 허락받았다. 26세의 부인은 죽창 등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 채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3일 만에 사망했다. 납치된 아녀자들은 남로당 반란군 수십 명에게 윤간 당한 뒤 전신을 죽창과 일본도 등으로 난자당해 생매장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일 년 후에 발견되었다. 포로가 된 폭도의 심문과정에서 시체 유기장소가 밝혀진 것이다.

(7) 9연대 남로당 병사 집단탈영 사건

1948520일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에서 남로당 프락치들이었던 하사관 11명과 병사 30명 등 총 41명은 같은 남로당원이었던 문상길 중위의 지령을 받아 총기와 실탄 14,000발을 휴대한 채 차량으로 집단 탈영했다. 이들은 지원 나온 것을 가장하여 대정지서를 덮쳐 경찰 4명과 급사 1명을 살해하고, 지서주임 등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탈영병들은 안덕지서, 중문지서, 서귀포 경찰서를 차례로 습격하려 했으나 대정지서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서귀포 경찰서로 곧장 가서 차량 1대를 빌려 타고 남원리로 갔다. 이때 빌린 차량 운전사는 눈치를 채고 위험을 직감하여 차량 고장 핑계를 대고 중간에 탈출했다. 탈영병들은 인민해방군 측과 착오로 접선에 실패하는 바람에 20명은 체포되어 군법재판에 회부되었고 실탄 3,500발이 회수되었다. 탈영병 대부분은 제주출신들이어서 이후 제주출신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8) 북촌포구 피습 납치사건

1948616일 오전 11시 제주읍에서 우도로 가던 풍선배 한 척이 풍랑을 피해 북촌 포구로 들어왔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을 비롯 경찰관 2명과 우익인사 및 주민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북촌리는 좌익성향의 마을로 마침 이때는 산에서 휴가나온 인민해방군 참모장인 김완식을 비롯한 78명의 폭도들이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경찰들은 김완식이 지휘하는 북촌리의 폭도 30여 명에게 체포되어 사살되거나 타살 당했다. 나머지는 산으로 납치되었다가 연락을 받고 출동한 군경에 의해 일주일 만에 구출되었다.

1949117일에는 북촌리 앞을 지나던 2연대 일부가 폭도들의 기습을 받아 4명이 사망한다. 현장에는 폭도들이 먹다 남긴 쌀밥과 돼지고기들이 발견되었다. 이에 군인들은 주민들과 폭도들이 내통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북촌리 주민들을 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보복총살을 벌이게 된다. 이 사건은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었다.

(9)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

1948618일 새벽 3, 대령 진급 축하연으로 술에 취해 잠든 11연대 박진경 연대장이 집무실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 남로당 프락치였던 문상길 중위의 지휘 하에 남로당 프락치 병사들 8명이 공모하여 야전침대에서 취침 중이던 연대장을 손선호 하사가 M-1소총으로 저격한 것이다. 박진경 연대장은 폭동 진압에 미적거리다가 해임된 김익렬 9연대장 후임으로 부임하여 적극적으로 폭동 진압에 나서고 있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남로당 프락치 병사들이 박진경 연대장 암살에 나선 것이었다. 암살 사건 수사는 진전이 없다가 모 하사관의 투서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8명이 체포되었고 1명은 무기를 소지하고 산으로 들어가 인민해방군 측에 합류했다. 고등군법회의는 문상길 중위가 폭도사령관 김달삼의 사주를 받아 암살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92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10) 북조선 창건 지지 지하선거

7월 들어 장마철이 되면서 43폭동은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실상은 지하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지하선거로 인해 제주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위하여 제주도민을 상대로 찬성 투표지를 받고 있었다. 폭도들은 죽창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백지에 날인을 받거나, 학교 운동장에 글자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강제적으로 한꺼번에 도장을 받는 공개투표를 실시했다.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김달삼 등 6명은 지하선거 투표지 52,350장을 가지고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3사건이 단독정부 반대를 위하여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일부 좌파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남로당과 43폭도들은 대한민국 건국에는 반대했지만 북조선 단독 창건에는 찬성하여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101일 소련 혁명기념일 대습격

101일 소련혁명기념일을 맞아 인민해방군 측에서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99일 북조선이 창건하면서 제주인민해방군은 사기가 올랐고 북조선이 남침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새벽 7시 경찰과 민애청의 전투를 시작으로 이날 오등리와 도순리를 비롯하여 몇몇의 경찰지서와 우익단체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습격을 받았다. 미군자료에 의하면 지서 1곳이 불에 탔고 경찰 7명이 살해당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대동청년단원 4명이 납치되었다가 1명은 탈출하고 3명은 피살되었다. 이날 일부 폭도들은 경비대 군복을 입고 있었고, 이날 공격은 밤 9시까지 계속되었다.

(12) 1024일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

1019일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사기가 충천한 제주인민해방군은 1023일 새벽 445분 삼양지서에 약 1백 발의 총격을 가하는 공격을 비롯하여, 조천지서와 함덕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저녁에는 조천리 서쪽 도로상에서 경비대를 태운 지프가 폭도들의 매복기습을 받았다. 제주도 북쪽을 중심으로 50여 군데에서 봉화가 올랐고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오후 8시에는 봉화가 오른 제주읍 남동쪽 숲 지역을 향해 박격포 40여발이 발사되었다. 14연대 반란 5일 후 남로당 반란군측은 소위 인민해방군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1024일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선전포고문국방군과 경찰원에게 보내는 호소문3,000매를 제주신보사(주필 김호진 등 3)에서 인쇄하여 요소요소에 살포했다. 1025일에는 대정면과 한림면 등지에서 봉화가 올랐고, 좌익 마을에서는 세력 과시를 위한 왓샤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여순 반란,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43폭동을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전면적 대응에 나서는 이유가 되었다.

(13) 1028일 삼양지서 습격사건

1028일 새벽 5시 약 50명의 폭도들이 삼양지서를 습격했다. 폭도들이 일제 수류탄을 지서로 던져 경찰관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당했다. 후속 교전 과정에서 다른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더 부상을 당했다. 한편 제주읍 방면에서 지원오던 경찰관들이 도로차단을 하고 매복해 있던 폭도들의 기습을 받아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폭도 3명을 사살하고 일제 소총과 수류탄 등을 노획했다. 28일 밤 제주읍과 삼양리 간에는 14곳에 돌을 쌓아놓은 도로차단이 있었다. 이날 대대적 습격은 전날 삼양지서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14) 111일 군경 프락치 사건

남로당과 제주인민해방군은 111일을 기하여 일거에 제주도 전역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다. 9연대 송요찬 소령이 부대에서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었다가 합선으로 인하여 모 하사관이 반란군 측에 기밀을 누설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9연대 내의 반란군 세포 80여 명이 검거되었다. 경찰에서도 구내 이발관에 근무하던 서용각 순경의 활약으로 정보를 입수하여 반란 3시간 전에 경찰 프락치 11명을 비롯하여 주요기관에서 암약하고 있던 반란군 프락치 83명을 체포했다. 이덕구의 선전포고에 호응하여 남로당은 군대, 경찰 및 주요기관의 프락치들과 인민해방군이 총 합세하여 관리들을 살해하고 관공서를 불태워 일거에 제주도를 해방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수포로 돌아갔다. 일부 자료에는 서용각 순경이 남로당 프락치였으나 전향하는 바람에 계획이 폭로되어 좌절되었다고 적고 있다.

(15) 115일 중문리 대습격

1948115일 새벽 5시경 300여 명의 제주인민해방군이 중문리를 습격했다. 경찰지서가 공격받아 경찰 2명이 피살됐고 면사무소와 중학교가 불에 탔다. 폭도들은 75채의 가옥에 불을 질렀고 식량과 의복을 약탈하여 마차에 실었다. 중문리는 해방구였다. 폭도들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오전 11시에 철수했다. 이날 습격은 대규모였고 계획적이었다. 폭도들은 동시에 안덕지서를 공격하여 위장공격으로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리고 전화선을 절단하고 도로를 차단해 지원 병력의 도착을 지연시켰고, 주요 길목에 매복했다가 지원 병력까지 공격했다. 중문지서로 지원 나가던 서귀포경찰서 병력이 강정리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민가 30여 채가 불에 탔다. 모슬포 9연대도 지원 출동을 나섰다가 매복 공격을 받아 1명이 전사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었다.

(16) 1111일 신엄, 조천 습격 사건

1111일 새벽, 60여 명의 폭도들이 두 패로 나눠 애월면 신엄리와 조천면 조천리를 동시에 습격했다. 신엄리와 조천리는 경찰지서가 있었지만 폭도들은 우익인사들을 노렸다. 신엄리를 습격한 폭도들은 다시 두 패로 나눠 동동네와 서동네를 공략했다. 폭도들은 우익인사가 집에 없자 3명의 식구들을 살해하고 약 80여 채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역시 조천리를 공격한 폭도들도 우익인사 집을 찾아다니며 식구들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 조천리에서 7명이 피살당하고 30여 채 가옥이 불에 탔으며, 신흥리에서 경찰 가족과 친척 6명이 피살당했다.

(17) 1128일 남원면 대습격

1128일 오전 6시 무장폭도 200명과 비무장폭도 500명으로 구성된 제주인민해방군이 태흥리를 덮쳐 민보단원 몇 명을 살해한 후에 남원면사무소 소재지인 남원리와 옆 마을인 위미리를 같이 공격했다. 경찰지서 소재지 두 곳을 동시에 공격한 것이다. 두 마을에서 폭도들은 지서를 포위한 채 동네를 돌며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살해하고 약탈 방화로 마을을 유린했다. 주택 250채에 불을 질렀고 민간인 50명이 사망했고 70명이 부상당했다. 폭도 30명을 사살하고 3명을 체포했다. 이때 남원면사무소, 남원국민학교, 남원중학원도 불에 타 소실되었다.

(18) 123일 구좌면 세화리 대습격

123일 밤 9시경 제주인민해방군이 구좌면 세화리를 습격했다. 이덕구가 직접 지휘하는 무장폭도 90여 명과 비무장폭도 20여 명이 동원되었다. 폭도들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불을 지르며 들어와 일사불란하게 소, , 돼지는 물론 쌀과 옷가지를 사정없이 약탈해 마차에 실었다. 묻지도 않고 사람이 보이는 대로 살해했다. 이 습격은 밤 2시까지 계속되었다. 이 습격으로 세화리 일주도로변에 있는 가옥은 전부 불에 탔고, 세화초등학교와 공회당, 마을 향사도 불에 탔다. 주민 5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가옥 40가호 150채가 불에 탔다. 이날 폭도들은 세화리에 이어 옆 마을인 평대리와 종달리도 습격해 민보단원들을 살해했다.

(19) 13일 하례리 대습격

194913일 국군에게 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남원면 하례리가 폭도들에게 습격 받았다. 하례리는 우익 마을이었다. 폭도들은 보초 서던 주민을 살해하고 새벽에 마을을 덮쳤다. 식량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국민학교를 불 태웠다. 마을 주민 25명이 폭도들에게 피살당하고 2명은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곧 숨졌다.

(20) 113일 성읍리 대습격

표선면 성읍리는 중산간 마을로 43폭동이 발발한 후에 군경이 주둔하는 진압대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동네였다. 1949113일 성읍리 민보단 주민들은 군인 경찰과 함께 대대적인 합동 진압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합동 진압대가 마을을 비운 틈을 타 오후 5시경 인민해방군이 마을을 역습했다. 폭도들은 집집마다 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식량을 내놓지 않은 주민들이 살해되었고 가옥들과 성읍국민학교가 불에 탔다. 이날 폭도들은 두 시간 동안 마을을 약탈했고 주민 38명이 살해 되었다.

. 사법부 재판

(1) 일반재판

194843일 공산인민유격대의 공격을 시작으로 미군정 측과 남로당 측간에 무력충돌이 격화되어갔다. 사태가 악화되어가자 경찰병력이 증가되었고, 자연스레 경찰이 검거하는 주민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따라서 제주지역에서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아지자 제주지방법원에서는 자체 검찰과 심리원만으로는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가 없어 중앙 사법부에 지원을 요청한 바 526일 제주지역에 검찰관 3명과 심판관 3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피고 37명에 관하여 판결을 하고는 611일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서울로 복귀한 이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재판이 힘들었음을 미군정청에 보고하였고, 미군정청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43사건과 관련된 재판을 광주지방법원으로 이관하여 실시하도록 하였다.

제주지방법원에서 광주지방법원으로 이관된 43사건과 관련된 사건은 총 74건으로 관련자는 131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1948. 10. 1부터 1948. 12. 29까지 약 3개월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판결내용은 사형 1, 무기 5, 징역형 82, 집행유예 8명이고 나머지는 무죄였다.

1948. 11. 17부터 같은 해 12. 31일까지는 제주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군법회의 외에 민간인 재판은 없었다.

계엄령이 해제된 후 부터는 43관련 피고인들은 다시 제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1949년 초부터 폭동이 가라앉는 1954년까지 43사건 관련자 599명이 판결을 받았는데, 361명이 실형을 받았고, 238명은 집행유예였다.

이들 중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2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은 계엄선포 전 제주지방법원에서 판결한 40여 명, 광주지방법원에서 판결한 80여 명과 계엄이 해제된 후 제주지방법원에서 판결한 80여 명 등 총 200여 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목포나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이 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일부는 국군에 의해 처형되고 일부는 북한군에 의해 옥문이 열리면서 석방되어 행적을 감춤으로써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